땅의 모든 끝이(시편 22:22~31절, 2020년5월25일 성경묵상)
땅끝이(시편 22:22~31절) 벌써 5월 25일 월요일 아침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신음하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빨리 시간은 흐르고 있습니다. 시편 22편에서 다윗은 처음에 어떻게 나를 멀리하고 도와주지 않고 나의 앓는 소리를 듣지 않느냐고 한탄했습니다. 낮에도 소리치고 밤에도 조용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그런 시인을 보고 조롱하는 것을 그가 여호와께 의지하면 구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조상들의 이야기를 생각해봐도, 시인을 모태에서 길러낸 주님을 봐도 주님은 언제나 변함없는 주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나를 멀리하지 말아 달라고 소리치고 또 소리쳐요. 그리고 이러한 고통은 예수님이 인용하여 메시아적 고난에 대한 묵상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시인에게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가 나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주는 신성자는 사실입니다. 나의 상황이 변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확신입니다. 저는 이런 확신이 좋아요. 얼마나 많은 성도가 상황 때문에 주님을 멀리하고 떠나시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야곱이나 요셉의 경우를 보면 그렇게 오랜 시간 방황하며 고난을 겪으면서도 주님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요셉의 경우는 굉장히 힘든 세월을 보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화가 났어요. 40년 뒤 아버지 야곱이 죽었을 때 형들이 보복을 두려워할 정도다? 그러나 요셉은 그 상황은 하나님이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믿었습니다. 많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것이 신앙 영웅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오늘의 시편은 21절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확 바뀌는데요. 주님이 나에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받았다고 외친 후 시인은 갑자기 확신에 찬 칭찬을 쏟아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이처럼 마음에서 일어나는 신뢰의 문제가 절대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필립보 감옥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했습니다. 억울하게 맞고 감옥에 갇혀도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는 믿음에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기쁨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런 면에서 시인의 이러한 마음의 변화는 저에게 큰 기쁨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극적인 마음의 변화를 담은 시편은 언제나 위로가 됩니다. 상황이 바뀐 것보다 믿음으로 마음이 바뀌고 기쁨과 감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기독교인이 특권 중의 특권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었을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바르게 인식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윗이 깨닫고 확신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바르게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22~26절) 일단 전혀 다른 분위기의 22절 이하는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22~23절은 찬양에 대한 호소입니다. 24~26절은 칭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27~32절은 땅의 모든 족속을 예배로 초청하는 예언적인 내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2~26절을 한 단락으로 묶어야 합니다. 다윗은 갑자기 내가 주님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 주님을 찬양한다고 선포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구절이 히 2:12절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는 것입니다. 히2:11~12절입니다. “거룩한 자와 거룩한 자들이 모두 한 근원에서 태어났으니, 그러니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말하되, 내가 주님의 이름을 나의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님을 교회 안에서 찬양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신성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신이라는 말입니다. 성스러운 것은 구별했다는 뜻입니다.즉, 거룩한 것이 거룩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불러내 신성한 백성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거룩함 때문에 부르신 성도를 뭐라고 부르십니까?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근원에서 태어났다는 말은 예수님과 우리 둘 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창시자이자 하나님이신 그분이니 당연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겪음으로써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예수님이 형제가 된 것입니다. 그 다음 말을 보세요. 초점이 모두 형제에게 맞춰져 있습니다.히 2:12절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나의 형제에게 선포하고 교회 안에서 찬양한다. 그렇네요。 시 22:22절을 일부 인용한 것입니다. 형제는 곧 뭐예요? 교회입니다. 13절에서는 이 형제라는 말을 저에게 주신 아이라고 말을 바꿉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형제가 지금 이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의 신분이자 현주소라는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이자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1절과 반을 보면 형제라는 말을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형제라고 부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이 말은 우리가 예수님과 형제가 된다는 것이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수준이 맞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몸뚱이이자 영광의 광채이신 예수님의 처지에서 보면 죄인 안의 괴수와 같은 우리와 형제가 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의 형제들에게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 즉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함께 성도가 된 사람들에게 무엇을 선포하겠다는 겁니까?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어지는 ‘회중에서 주님을 찬양한다’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회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하르'(lh;q;)는 회집된 이스라엘 공동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시편 35:18절에서는 ‘내가 대회 안에서 주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백성 중에서 주님을 찬양한다.’라고 합니다.여기서 ‘대회 안에서’라고 번역된 말이 카할입니다. 구약성경의 교회를 가리키는 공동체적 언어가 바로 카하르입니다. 출 16:3절